1953년 봄 미국 구호단체연합체(ARK)가 한국전쟁 고아와 구호민 옷 수집 캠페인을 위해 만든 포스터를 들고 있는 어린이들. <뉴욕 타임스> 53년 3월17일치에 실린 사진이다. 윤정란 제공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와 함께 한국전쟁·박정희집권기 세확장 사회 주류 포진 ‘보수’의 핵으로
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지음/한울·3만4000원
윤정란 지음/한울·3만4000원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이들에겐 ‘악몽’처럼 등장하는 이름. 흔히 서북청년, 서북청년단으로도 불리는 서북청년회(서청)는 해방 뒤 1946년 말 서울 종로에서 결성됐다. 사회주의 소군정이 들어선 북한에서 이른바 반동분자로 찍혀 탄압받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생존하기 어려워 월남한 서북지역 출신들로 이뤄졌다. 황해도 이북과 평안·함경도 지역 출신들이 각기 활동하다 더 강한 세력이 되고자 기존 조직을 해체·통합한 것이다.
서북청년들의 ‘활약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46년 대구봉기(10월항쟁)와 1948~54년 제주4·3항쟁의 진압이다. 서청에 대한 기존 연구는 2000년대 초까지 민간인 학살의 주역으로, 그 잔혹한 폭력의 동기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주로 이뤄졌다. 그들은 그뒤 아마도 한국인 다수의 기억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학살 피해의 패러다임을 넘어” 서북청년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책이다. 그들 월남한 서북청년들의 뿌리를 추적하고, 그들이 신사상(기독교)을 젖줄 삼아 ‘전투적 반공주의’로 무장한 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공간과 5·16쿠데타를 발판으로 하여 어떻게 남한 사회의 주류로 발돋움했는지를 다룬 역작이다. 역사학자 윤정란(케임브리지대 한국전쟁연구사업단 연구원)이 5년여에 걸친 연구·집필로 완성했다. 아이러니한 언사로 표현하자면 19세기 말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태동한 한 개신교 세력의 20세기 ‘성장담’이라 할 것이다.
왜 서북 지역인가. 그곳은 조선 내내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됐다. 19세기 말 그곳에서 성장한 신흥 상공인층과 지주들은 새 사회를 꿈꾸며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문명의 첨병으로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수용했다. 이 지역 지식층은 평양·단군으로 상징되는 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 파악하며 구한말과 일제 시기 기독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이렇게 맞은 해방공간, 북한 체제의 토지개혁과 사유재산권 부정은 그들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었다. 해방 뒤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하다 월남한 사람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까닭이다.
서북청년들의 연원을 좇는 이 책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한기총 초대 회장이자 한국 개신교계의 존경받는 원로로 일컬어지는, 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1902~2000) 목사다.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북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했던 한경직을 중심으로 속속 결집했고 영락교회는 “월남자들의 신앙 공동체이자 반공의 전투기지”로 구실했다. 영락교회 학생회·청년회가 서청의 중심이었을 만큼 이 교회 자체가 서청 탄생에 깊이 연루돼 있다.
한경직 목사는 80년대 초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청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 목숨 걸고 이른바 ‘좌익 척결’의 선봉에 섰다. 미군정의 국립대학설립안에 수많은 교수·학생이 반대운동을 벌이자 서청은 그 핵심을 좌파라 단정짓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6000여명의 회원을 경성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에 편입학시켰”으며, 경성방직·동양방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파괴에 전위로 나선 것도 서청이었다.
한국전쟁은 서북 개신교인들에게 기회의 공간으로 작용했다. 그 중심도 한경직이었다. 그는 남한 개신교 장로회에서 신사참배 거부그룹과 조선신학원그룹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았다. 그 힘은 “미국에서 들어오던 방대한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의 독점”에 있었다. 서북 출신인 그는 전쟁 전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밀착 관계를 활용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통역을 전담할 수 있었던 덕이다.
이승만 정권기 한때 정치적으로 배제됐던 서북 출신들은 5·16쿠데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다. 서청 회원들은 한국전쟁기 조선경비대(국군)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대거 들어갔다. 47년 입교한 육사 5기생 중 서북 출신이 3분의2였고, 48년 입교한 8기에도 서북 출신이 많았다. 5기와 8기의 서북 출신 장성들은 “1961년 군사 정변의 주역”이다.
그 28년 뒤인 1989년 6월 한 신문 기사는 흥미로운 유행어를 소개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그 기사는 저 말의 배경을 이렇게 썼다. “요직을 과점한 대구·경북 세에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원로 그룹들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국회의장·국무총리·대통령비서실장)임을 빗댄 것으로, 노스웨스트는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다. 이들의 성장과 영향력 확대는 한국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소망교회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소망교회는 서북 출신 목사 곽선희가 세웠다.
<한국전쟁과 기독교>는 한국 개신교 주류의 뿌리를 톺은 책이다. 그 뿌리라 할 서청이 가담한 일 중에서 4·3 진압의 희생자는 수만명에 이른다. 그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있었으되 민간 차원의 사과는 아직 없다. 한국 개신교계는 과거 서청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일각에서나마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지?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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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 재건, ‘이념적 광기의 시대’로의 퇴행
서북청년단의 정치테러, 권력 비호로 가능
스스로 반공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던 선우휘가 쓴 ‘테러리스트’라는 소설이 있다. 해방정국과 분단정부 수립과정에서 “빨갱이를 치는”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필요악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던 한 우익청년단체의 회원들이 정작 분단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정권에 버림받아 “영락없이 룸펜”으로 전락해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짐승처럼 멱살을 부여잡고 뒤엉키는 모습을 그린 결론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소설에 나오는 몰락한 우익청년단체란 서북청년회(약칭 서청)를 가리킨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말 출범한 이래 이승만정권이 1948년 12월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이라는 어용단체를 꾸릴 때까지 2년 남짓 존재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테러집단이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 가운데 특히 혈기왕성한 청년층이 ‘반공’을 표방하면서 만든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말이 청년단체이지 하는 짓은 정치깡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을 비호하던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조차 나중에는 진저리를 칠 정도의 비인간적 테러집단이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 활동의 기본은 ‘빨갱이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벌인 폭행, 암살, 그리고 집단학살이었다. 서북청년회의 백색테러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좌익에게만 테러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누구에게라도 좌익의 혐의를 씌워 테러를 자행했다. 그리고 테러의 끝은 암살과 집단학살이었다. 1948년에 일어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 바로 이승만정권의 하수인이던 서북청년회였다. 실제로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 출신이었다. 서북청년회의 암살 명단에 오른 것은 정치지도자만이 아니었다. ‘좌익편’이라는 이유로 현직검사가 암살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북청년회는 기업주의 요구에 따라 노동조합 파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북청년회의 악명을 높인 것은 4·3사건이었다. 제주도를 피로 물들게 한 주범은 서북청년회였다. 4·3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 희생된 제주도민은 3만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 학살의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힘없는 민간인을 폭행하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끝내는 학살했다. 그래서 지금도 제주도 사람들은 서북청년회를 ‘사람백정’이라고 부른다.

한낱 청년단체이던 서북청년회가 이처럼 당대에 “입법·사법·행정의 3권 위에 군림하던 특권부였다. 깡패집단도 세상에 그런 깡패집단은 없다”(당시 육군 정보부대원의 증언)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마음껏 테러를 자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권력의 비호였다. 미군정의 경찰력을 책임지고 있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모두 서북청년회의 후원자였다. 이승만대통령도 처음에는 서북청년회를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 적극 활용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의 무투표당선을 위해 경쟁자이던 최능진의 선거등록 서류를 탈취하는 사건을 벌인 것도 서북청년회였다.
정치깡패에 지나지 않던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권력의 비호 아래 군복과 경찰복을 입고 순식간에 군인과 경찰로 둔갑하기도 했다. 4·3사건 등에서 서북청년회가 군경을 제치고 민간인학살을 주도하게 된 데는 이러한 정치적 후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물론이고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정권도 애초에 정당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군대와 경찰 같은 무력기구를 통해서도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결국 서북청년회라는 사적 기구에 국가폭력의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권력의 비호 아래 서북청년회는 군경보다 더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것도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테러였다. 똑같이 반공을 표방하는 우익 안에서조차 고개를 저을 만큼 극악한 테러 활동을 벌인 것이 서북청년회였다.
그렇지만 서북청년회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조차 한때 서북청년회의 파시스트적인 폭력행위에 질려 해산시킬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단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이승만정권에게도 서북청년회의 악명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정권은 서북청년회를 매몰차게 버렸다. 대한청년단을 만들 때 서북청년회는 그저 여러 청년단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서북청년회는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만 남기고 사라졌다.
단체 정식 명칭도 모르고 재건?
2014년 9월, 서울 한복판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서북청년회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9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이하 ‘재건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갑자기 나타나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11월 28일 급기야는 ‘멱살잡이 난동’ 끝에 서북청년단 재건 총회가 백주 대낮에 강행되었다. 그런데 재건의 대상으로 거론된 서북청년단의 정식 명칭은 서북청년회이다. 서북청년회라는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서북청년단 운운하면서 우국지사인 듯이 행세하고 나선 것이 ‘재건준비위원회’라는 요상한 조직의 실체인 셈이지만 과연 이들이 과거 서북청년회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사람들은 서북청년회의 정체를 잘 모를 것이다. 서북청년회의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라면 이미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처럼 된, 그래서 역사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테러집단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일도 없다. 실제로 서북청년회는 해산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서북청년회의 후계임을 자처하는 단체가 등장한 것이다.
‘재건준비위원회’ 주도세력은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반공활동의 혁혁한 공을 세운 서북청년단을 재건해 현재 대한민국을 횡행하고 있는 종북좌파를 척결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종북좌파’란 일차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러한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가가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주장에 대해 케케묵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꼴을 보면 이들이 ‘종북좌파’ 척결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짓을 하려는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의도 아래 그런 짓을 하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자들이 만든 단체였다. 그런데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탈북자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상징하는 ‘서북’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 이유는 뻔하다. 박근혜정권에 대한 충성전선에서 자신들이 가장 앞서 있으며 박근혜정권의 안위를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에 의해 키워져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완장부대’ 서북청년회를 재건해 박근혜정권에서 또 하나의 완장 부대가 되겠다는 속내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재건준비위원회’의 면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재 밝혀진 주도세력은 ‘일베’ 회원, ‘박사모’ 발기인 등이다. 한마디로 친정권세력의 일부가 박근혜정권의 위기가 곧 대한민국의 위기라는 엉뚱한 논리를 앞세워 정권의 위기를 구하는 선봉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위 소속 회원들이 28일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재건총회 행사를 강행하며 수련관 직원이 멱살을 잡고 밀치고 있다.ⓒ미디어오늘 제공
‘법치’마저 사라지고 ‘백색테러’ 난무하는 2014년
서북청년회이든 서북청년단이든 당대에 이미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로 한국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테러집단을 재건하겠다는 것 자체가 2014년 대한민국의 비극적 자화상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비극은 비극적 장면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이 등장한 시점은 친일파와 독재정권 옹호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사람이 KBS 이사장이 된 시점과 묘하게 맞물린다. 이인호 신임 KBS 이사장은 ‘망언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근현대사를 왜곡하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는 국회의원들 앞에서도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그리고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김구에 대해 건국의 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극언을 했다. 이러한 발언의 배후에는 10여 년 전부터 뉴라이트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역사 왜곡 작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을 공인화하려는 음모가 진행중이다. 뉴라이트의 대부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된 이후 역사 관련 국가기구와 공공기관의 수장 자리를 꿰찬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뉴라이트 인물들이다. KBS 이사장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친일파와 독재권력을 미화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독립운동가를 폄하하는 망언을 의도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김구 때리기가 대표적인 보기이다. 김구를 매도할 수 있다면 다른 독립운동가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김구 등 독립운동가가 차지하는 자리에 친일파를 집어넣어 근현대사 인식의 큰 흐름을 바꾸고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박정희 같은 독재자를 각각 건국의 아버지, 근대화의 아버지로 재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뉴라이트가 벌이는 역사왜곡작업의 큰 그림이다.
따라서 박근혜정권이 이승만정권을 미화하는 데 앞장선 뉴라이트 인물들을 중용한 뒤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재건준비위원회’를 주도하는 인물이 인터넷 일베 게시판에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다.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 씨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이다”라는 글을 올린 것은 이인호를 비롯한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판박이로 닮았다. 뉴라이트가 박근혜정권의 비호 아래 역사왜곡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과 ‘재건준비위원회’ 같은 극우테러집단이 등장해 암살과 학살을 다시 벌이겠다는 극언을 퍼붓는 것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다.2014년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백색테러 시대로의 회귀 움직임은 민주주의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비록 더디지만 차곡차곡 진전되어 왔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하던 세력이 이제 역으로 ‘자신들만의 민주주의’를 만끽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재건준비위원회’ 사건은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박근혜정권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박근혜정권이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권력행사가 가능했다면 서북청년단 재건 운운하는 소리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부터 쌓여온 여러 문제에 세월호 참사가 겹쳐지면서 박근혜정권은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마치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정당성의 위기를 서북청년회의 사적 폭력행사로 돌파하려고 했듯이 박근혜정권도 법을 내세우는 공안통치만 갖고는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부족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정당성이 취약한 권력은 늘 극단적인 세력을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고는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박근혜정권이 정말 합리적 보수라면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에 대해 선을 긋거나 제지해야 하는데 경찰도, 검찰도 폭력과 암살을 공공연하게 떠드는 예비테러집단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침묵으로 방조하는 것은 여당도, 보수언론도 마찬가지이다.
극우테러운동의 본질은 폭력을 통해 말하는 사람들을 점차 고립화된 소수로 몰아감으로써 결국에는 다수의 대중을 침묵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순응하는 대중 위에 군림하고는 한다. ‘재건준비위원회’ 사건에서 권력과 연결된 불온한 정치적 목적을 읽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위기에 처한 정권을 구한답시고 과거의 잔학무도한 테러집단을 재건하겠다는 발상은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서북청년회는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의 표상이었다. ‘재건준비위원회’ 사건도 우리 사회가 다시 이념적 광기와 사적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로 퇴행하는 징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며칠 전에 열린 이른바 서북청년단 재건 총회의 모습은 그 예고편인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극우세력 곧 ‘거리로 나온 넷우익’과 ‘재건준비위원회’가 겹쳐 보이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세력은 극우 안에서도 아직은 다수파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에 이름을 올리는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볼 때 백색테러에 동조하는 무리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심지어는 전직 대법관 출신이 서북청년단 고문을 맡았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어떻게 평생을 법으로 살아온 사람이 백색테러집단에 동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서북청년단 재건 움직임은 입만 열면 ‘법과 질서’를 외치는 한국 극우의 민낯을 보여준다. 서북청년단 재건을 방조하면 한국사회는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법과 공포가 판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칭 보수우익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서북청년회 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필자 주-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민족사랑’ 2014년 11월호에 실린 시론을 조금 고친 것이다.
<2014-12-02>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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