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성경 적이 아니며 참된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없다.
글쓴이 : 김 은 수 목사(20140825)
현제 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이라는 이 신경은 주후381년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2바티칸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을 때, 당시 로마 카톨릭의 세(3)감독이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고백서를 12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도신경을 다함께 암송하는 이유에 대한 변(辯)--(그들의 주장들)
1,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6,000년 역사를 모두 합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사도신경이 그들의 주장처럼 과연 성경적인가? 라는 것은 앞으로 그 내용을 파악해 보면 알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의 요약문이다.
●그러나 본 신경은 신앙의 요약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교회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될 수 없다-(주장).
●올바른 신앙 고백이 없으면 올바른 교회가 아닌 것은 맞다. 그렇다면 올바른 신앙고 백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고백 문이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러나 본 신앙고백은 성경과는 너무나 다르다. 따라서 본 신경은 대단히 잘못된 신경으로서 이러한 신경이 그들의 교리를 주장하고, 대변하는 것이라면, 본 신앙고백서를 만든 로마 카톨릭은 대단히 잘못된 교,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주장).
●따라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교묘하게 파괴시키려는 이단의 침투에서 성도들을 지켜준 다는 이런 내용과는 실제로 그 사항은 전혀 반대다. 본 사도신경은, 만든 그들이 “성경”과는 너무나 다르게 말하고 있으므로 본 신경이 성도의 신앙고백이 될 수 없 을뿐만 아니라, 신경대로라면 가장 큰 적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바로 기독교인들이 되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주장).
●그러나 기독교의 표준은 성경 외에는 없는 것이며, 현제의 사도신경은 전혀 성경적 이지 못하다.
❊사도신경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단체나 개인은 잘못된 이단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본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원래 로마 카톨릭교회 에서만 사용하던 것을 개신 교에서 차용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이 어떤 단체라는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 다.
3) 사도신경은 공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주장)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 고백문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중심적 신앙 표현이나 주장이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공식적이고 성경적인 신앙고백이다.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나, 지금의 사도신경은 그렇지 못하다. 라고 하는 데에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도신경의 유래와 변천과정》
-전설은 이렇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 외 다른 사도들도 대체로 일찍부터 어려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12 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ㅡ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ㅡ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ㅡ431년의 에베소회의,
ㅡ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 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그 목적이 로마 카톨릭,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4세기경라틴어 [Symbolum-Apostolicum]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 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있다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이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현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된다.
*거룩한 공의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이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을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특히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이다.
(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오늘 날로 비하면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의 맨 마지막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 신경은 끝맺음되어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도 신경이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카톨릭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 한다. 그러나 사도 신경을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을 약간은 삭제하고,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사도신경은 성경적으로 볼 때 과연 옳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도 예배 때 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외우고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 여부를 따져 보기도 전에 그냥 다른 교회에서 하니까, 또 지금까지 해 왔으니까, 라는 생각에서 이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런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모두가 하니까! 따라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지금까지 암송하고, 예배 시에 나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하면서 고백했던 이 사도신경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니면 마귀적인 것인가? 정확히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우선, 성경 어디에도 사도들이 신경이나, 신조를 만들어서 외우게 하였다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이란? 그 제목부터가 잘못되었다.
▶사도신경을 성경과는 다르게 가르치는 문제의 표현들을 보면--
카톨릭교회는 사도신경을 교묘하게 변형, 오용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요 교리인 교황권을 성경보다 우의에 두려는 교회의 권위, 마리아 숭배 사상, 성인숭배 사상 등과, 비 성경적인 교리 등을 삽입하여 참으로 올바른 진리의 신앙을 가로 막고 있다.
--이제 그 한 구절, 한 구절을 분석해 보자--
※지금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 돼야 할 중심 내용이 빠지거나, 혹은 약화 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시며, 성경 말씀의 중심이요, 모든 진리의 중심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믿음을 가진 자의 모델이며, 표본이시다. 그러므로 “신경”이란? 이처럼 예수그리스도가 빠지거나, 희석 되거나, 또는 약화 되었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도신경에는 이처럼 중요한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있다고 해도 약화시키거나, 아니면, 아애 빠져 있음을 보게 된다.
글쓴이가 너무 나쁘게 표현 하고 있다고 보는가? 다음의 하나, 하나를 더듬어 보면 그 내용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약화 시키거나 빼게 된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 고의 적이라고 보기 보다는, 사단이 믿는 자로 하여금 철저히 구원의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또는 넘어트리게 유도 하므로 모든 영혼들을 멸망케 하려는 사단의 전략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사도 신경”즉 우리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 하나하나를 보기 원한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가 영안의 눈을 떠서 이 “신경”의 맨 처음의 고백을 보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철저히 상실, 배재, 또는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될 것이다.
신경은 처음 시작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작전으로 쓰여 졌다.
“천지”(를 만드신)→온 우주의 창조물을 단순히 “천”“지”하늘과 땅으로만 재한 하고 있다.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사람을 비룻 하여, 각종 짐승과 모든 만물이 모두 말씀이신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본 “신경”에는 하늘과 땅 만을 창조한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부인 못한다. 이것은 성경이 증명하고 있다.→창2:4에 “천지”는 하늘과 땅 만을 창조 했을 둘째 날의 창조 때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때는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사람도 없을 그런 때요, 들에는 초목도 없을 그러한 때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아!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나? 천지 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은 다 포함 되는 것이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너그럽게 봐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사도신경을 만들게 된 배경을 보게 되면, 이러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하여 무참히 고문하고 죽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그들이 말하는 대적 자의 선별기준이 이와 같은 “사도신경”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냥은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왜인가? 그것은 이 신경 속에, 정통적인 기독교를 말살 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음흉하고,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만드신→ 여기에서 우리는 “만드신” 과 “창조”와의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지, 만드신 분이 아니다.
*창조란?--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것을 “창조”라고 한다. 그래서 창1:1절에서 ארב(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1절의 태초는 תישׁאר(레쉬트)사용함으로서 우주역사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든다”란?--어떤 원인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만드신”한 것은 이미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만드셨다는 것이 되므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곧 하나님 되심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능력을 상실케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즉 예수님당시에 제사장, 서기관과 장로, 바리세인들이 나사렛예수를“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므로 미워하여 죽였던 사실과 그 뜻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천지 창조는?--없는 가운데서 있게 했으므로↦“창조”이고
※사람은 흙을 재료로 하여 지은 것이므로↦“만들었다”“지었다”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 창조- 1장과 2:7을 자세히 보면, 모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1:27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창조는 그 뜻을 달리한다)
*따라서 만약에 이 “신경”을 고친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람과 온 천지, 그 가운데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정확하게 예수그리스도로 밝혀 준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함을 받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요 1:2).
또한 골로새서1장은 이렇게 말한다.
16절-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다시 히브리서 1장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에베소서 3장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 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윤이 어떠한 것을 드려 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조사역에서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주도적 역할을 하셨다.
그러므로 첫째 날부터—마지막 여섯째 날 까지 보면, 창조시마다 “가라사대” 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가라사대”는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구약시대에 무수히 나타나셔서 일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분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았고 기뻐했으며(요8:56-8),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1:26).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자 이시지/ 만든 자가 아니다. 창조는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는 것, 즉 “ארב(바라)” (무에서 유를 창조, 즉 시작을 말함), 그러나 “만드시고“ 라는 것은—어떤 원인되는 것을 재료로 해서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상실케 하는 것이 되고 마는 중대한 문제이다.
하나님 아버지→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놓고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명한→“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연결했을 때는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지!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것으로 정 반대의 말이 되고 만다. 왜냐?--“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했으므로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아니다. 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사단의 계략이다.
이글을 시작 하면서 처음에 말했듯이 본 사도신경은 우리를 구원할 예수그리스도를 철저히 상실시키고, 배제하고, 숨기기 위한 사단의 전략 가운데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다.
▶사단은 이렇게 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고, 구원의 역사를 철저 히 차단시키려는 고도의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격하 시켜야만, 그들이 숭배하는 마리아를 격상시킬 수 있기 때문 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 중에 —“성모마리아 무염시태교리”와 “성모 마리아 성천교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예수의 자리에 혹은 그 이상으로, 마리아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카톨릭의 전략에서 보면, 이러한 사도신경에 위반되는 그 어떤 개인과 단체에 대해서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카톨릭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신교가 그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만 보드라도 사도신경을 통한 사단의 고도의 계략은 참으로 무섭다.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고도의 사단 전술로, 믿는 자를 철저히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단의 전략에 로마 교황청의 카톨릭은 그기에 춤을 추며 시종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여기에 우리개신교가 그들의 책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도 안타깝다.
2,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서도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희석 내지는 소멸시키려는 내용 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외아들은 아들 둘 이상이 있다가, 하나만 남고, 나머지가 다 죽으면 그 남은 아들은 외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의 독생자가 계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독생 하셨던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는 독생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외아들과 독생자는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
▶예수님은 독생자이지, 외아들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아들이라는 말은 마리아의 육신적 몸을 통해서 월경으로 태어남을 뜻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사단의 술책이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인간일 뿐임을 말하기 위한 속셈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격하시키고, 마리아를 그분 예수의 어머니로 격상 시키려는 괴악한 의도이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높아지면, 따라서 마리아는 더 높아지게 만드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보다, 마리아를 믿어야 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엔 신도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한 마귀의 최종 전략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외아들”이라 한 것은→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하는 의도에는—카톨릭은 마리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를 숭배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격하 시켜야만 했고, 그리하여 소위, 마리아 무죄 설, 마리아 승천 설 까지 만들어서 신도들을 세뇌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문장을 수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수정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로 수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꼭 참고로 해야 할 것은, “보내신” 이라고 하는 말이다.--“보내신”이라는 말 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뜻, 그분의 목적, 그분을 속죄주로 보내신 내용, 역사, 등이 다 들어 있는 함축된 말이다. 그러므로 “보내신“ 이라는 말을 빼면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 이 “보내신”이라는 한 마디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신가? 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17:3 의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이 “보내신”을 빼게 되면, 그를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됨으로서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된다.--여기서 안다는 것은→요한일서4:8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 이라는 것이니, 그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요일서4:9절의 독생자로 세상에 보내셨고,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 요일서4:10절의 화목제물 되심이다. 그러므로 “보내신”이라는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 성경:(요17:3, 8, 21, 25)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그분의 그 권위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 됨, 등을 약화 시키고자 하는 마귀의 술책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 되신 분이시다. 마태 1장20절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다비드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맞이하기를 두려워 말라.
그녀 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져서 계시느니라.
▶그러나 위의 “사도신경”을 그대로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난자와 하나님의 어떤 무엇과 결합해서 태어나신 어떤 그러한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오해의 해석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마귀의 술책을 발견하는 것은, 마리아의 육신적인 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끼어 맞추려고 하는 악한 교활함이 이 내용 속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신경”은, 마리아와 하나님의 결합으로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는 것은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사상에서 비룻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완벽한 인격체인 사람이요, 완벽하신 하나님으로서,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서 마리아의 태아에 담겨 있었던 것뿐이요. 때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아를 열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태어나게 한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경을 보면, 마귀의 술수를 알 수 있게 된다.
마태1:23—“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처녀 라는 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마리아에게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이용한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 신경에서는, 잉태한 것은 성령이지만, 태어나게 하신 것은 “마리아 에게 나셨다고 하는 것으로서”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사실은 뒤로 미루고, 그 자리에 동정녀를 배열하여 마리아를 성령님보다 더 위인, 하나님의 자리에 동격으로 부각시킴으로서 마리아 숭배사상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다)
▶사실 천주교 에서는 1854년에 “성모마리아 무염시태 교리”를 발표하고, 1950년8월15일에는 성모 마리아 승천교리 등을 선포하였으며, 그 후 12월25일의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천주교인들의 대 축일로 지켜오고 있음을 봐도 알 수 있다.
*실제, 마리아는 적어도 5남 2녀 이상을 낳았다.
자녀들은,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였으며, 딸들도 복수인 것으로 보아, 둘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3:55)
▶그러나 카톨릭은, 이들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둥, 마리아가 동정녀로 살았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필사적이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카톨릭의 마리아 종교사상에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정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정녀는 처녀와 다르다.
처녀는 결혼이전에 처녀인 것이고, 동정녀는, 평생 동안 처녀로 살기로 서약하고 그렇게 산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고친다면--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처녀를 통하여 나시고(사7:14, 마1:23, 처녀가 잉태하여) 라고 하므로 마리아의 이름을 빼는 것이 더욱더 성경적이요,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처녀인 여자이지, 마리아가 아니라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위해서 단지 여자라고 하는 몸을 빌렸다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단, 눅1:30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을 밝힌 것은 마태1장과 누가3장에서 족보를 밝히기 위함이라는 것으로 이해했으면 한다.
그러나 신경에서는-“마리아에게서 나시고”---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마리아를 격상시키고, 예수님은 격하시키기 위한 목적이 확실하다.
이것은 카톨릭이 마리아의 숭배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며, 이에 따른 그들 교리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높이고, 예수님은 격하시키는 일을 하여야 했다.
▶소위 카톨릭은 마리아가 승천했다고 믿고, 또 마리아의 무죄 설을 주장하고 있다. 성령과 마리아를 동일 격으로 만든 것이다.(잉태보다는 아들을 낳은 마리아의 역할이 더 커다는 뜻)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마리아를 동일 선상에 두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는—그들의 교리 중, 마리아 숭배 사상에서 볼 때,
즉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 되고,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므로 자신들의 신격의 대상인 마리아를 어머니로 삼창을 부르며, 숭배하는 그들의 교리사상에 기인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이것은 극히 인본주의 적이며, 극히 샤머니즘의 미신적이요, 불교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카톨릭은 모든 종교는 다 좋다, 모두 화합하자 라고 부르짖는다.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다. 라고 하는 성경의 뜻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의 능력을 약화하여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상실 시키고자하는 다분한 마귀의 술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능동적이지 못하고, 피동적인 것으로 유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를 능동적인 것이 아닌 피동적인 것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스스로 당하신 것이지, 십자가를 지기 싫은 상태에서 누구에게로부터 심한 박해와 강요를 당하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마치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그 고난으로 인하여 마지못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오해하도록 하고 있다.
요한10:17---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 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그러나 신경에서 말하고 있는“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은 예수 스스로가 아닌 마지못해서, 빌라도의 고난 때문에 어찌할 수 없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말로 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백성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하신 것이다.
∎실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마27:19,23, 눅23:4,13-15,20,22,)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그 어린양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들, 율법주의의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눅22:52, 66,23:2,10, 13,14, 18,20,22, 마27:1-죽이려고, 12-고소당함, 20-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못 박으라, 23,25, 마27:62-66-무덤을 지킨 것도, 대제사장의 파수군 들)
위 신경은 성경의 기본 진리를 모르고 썼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상당히 의도적인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앞서 말한 것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폄해 하고, 예수께서 구세주 되심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드려 냄으로서 예수를 끌어 내리고 마리아를 높이기 위한 작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요즘 일부 교회에서는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로 바뀌서 사용하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빌라도 아래가 되었든, 위에가 되었든, 여기에 빌라도가 나올 자리가 아니다.
굳이 기록을 해야 한다면,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 그리고 유대민족과 범죄 한 이방인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이렇게 수정 되어야만 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빌라도만의 죄가 아니다.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본디오 빌라도만의 죄가 아니다. 빌라도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준 인물 이기는 하지만, 그는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애를 쓴 흔적을 성경 속에서 읽을 수 있다.
(마태27:19,23-24, 눅23:4, 13~15, 20, 22--등)
∎죄를 논한다면, 유대민족과 나의 죄 때문이다.
*굳이 죄를 논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하게 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유대민족이요, 이방인 우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장본인들이다. 그 당시에, 대 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틈만 나면 귀회를 노려 예수를 없애고자 하였고, 결국 빌라도를 이용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마27:1-2, 12, 20-26, 눅23:1-2, 4, 10, 18, 20-25)
∎온전한 신경이 되려면-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므로,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로 고백되어지는 것이 나의 신앙의 고백으로서 옳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만, 온전한 신경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도신경”에는 이와 같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다는 나의 신앙의 고백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사53:11,12—많은 사람의 죄악 담당/ 롬3:22, 25-26—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또한 이 대목에서 중대한 다른 하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소위 “신경”이라 함은, 교리의 중요부분을 요약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제의 사도신경은, 전체를 통해서 보아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그분의 죽으심으로 무엇이 이루어 졌으며, 나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이루어 졌는가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신도의 눈가림 작전이며, 오히려 수십억 신도의 영안의 눈을 더 멀게 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롬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 을 지불하셨다.(요한일서4:10-속죄제물, 롬3:25-화목제물)
‣이로 말미암아 이 사실과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3:24)
그런데 이러한 진리가 현 사도신경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대상인 예수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격하 시키고자 했고, 반대로 마리아를 격상 시키고자 하는 카톨릭을 이용한 마귀의 술책이 여실히 드려나는 대목이다.
▶예수님은 죄인인 내가 못 박혔어야 할 그 십자가에(롬3:19) 내 대신 못 박히셨다(롬3:25,요3:1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인 것이다(갈2:20, 5:24)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갈2: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대신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다.
(고후5:15, 고전3:23, 6:19-20, 12:27)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셨으며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롬4:25)
※사도신경은, 바로 이런 중요한 속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구원의 진리를 소멸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배후에서 교묘하게 카톨릭을 조종하여 구원 얻는 백성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교활한 술책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잘못된 신경을 사도신경이라 하며, 내 신앙의 고백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고백해 왔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단의 궤술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5),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말, 역시 이 하나의 문장만으로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앞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와 연결해서 본다면, 많은 문제점들을 낳는다.
“신경”이라 함은—구원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해 놓아야 하는데, 사도신경 전체를 보아도 구원의 핵심을 전혀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믿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더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말을 문장 그대로를 놓고 보면,
1)주님 스스로가 죽으신 것이 아닌, 마지못해서, 타의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빌라도의 고난 때문에, 그 고난에 의해서 예수께서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주님 십자가의 죽음은—타의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를 사랑하사 인류 구원을 목적으로 스스로 죽으신 속죄의 제물 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요10:17-18)-17절: 내 스스로가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 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외우며, 고백해 왔던 사도신경은↦이러한 주님 스스로의 죽음을, 빌라도의 고난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죽은 죽음으로 치부하고 있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못된다고 하는 잘못된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고 있다.
2)당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포악무도한 죄를 지었을 경우에 그에 대한 죄 값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니, 예수그리스도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죄를 지어서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죽었다. 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신경”에서는 그분 예수가 의인이다, 죄가 없었다. 라는 말은 전혀 언급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죄수들이 달려죽는 그 험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예수를 하나의 사람 중 조금 나은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동일한 죄인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이 문장의 내용이다.
3)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죽게 된 것이—빌라도에 의해서 고난 받고, 죽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빌라도에 의해서 고난 받고, 죽은 것이 아니다,--그러나 이렇게 빌라도의 고난에 의한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주님의 속죄의 역사를 약화 시키고, 온 인류의 구세주 되심을 의도적으로 비하 하려는 사단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롬3:23,24, 5:8),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마27:35,38, 막15:25, 요19:18)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다(요1:29)
*이로 말미암아 이 사실과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은혜의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본 “신경“에서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지금의 사도신경 속에서는 이러한 진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
로서(갈2:20), 곧 나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롬4:25에-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 줌이 되셨으며,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현, 사도신경에는 이러한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여서 다른 데로 그 관심을 돌리게 하려고 사탄이 배후에서 카톨릭을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희석 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짓이라고 밖에 불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자는 빌라도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인데,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었다. 라고 말함으로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예수로 전략시키려는 사단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 하는 것이며, 극히 비 성경적이요, 마귀적인 것으로 “신경”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에 예수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 의해서 고난 받았고, 죽으셨던 것이다.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려고 애썼던 사람이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안 믿는 자가 예수를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다는 말씀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다.
즉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를 죽였던 막12:7의—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고 하는 말씀과 뜻을 같이 한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신경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참뜻을 희석시키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만 상관이 있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러한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 함으로서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되게 만들려는 마귀의 술책이다.
※따라서 신경의 글대로라면, 결과적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죄인이요, 죽기 싫은 데 억지로 죽었고, 나의 죄와는 상관없이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 자신 스스로 지은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자로서 결론적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지 못한다. 라고 하는 정말 고단수 마귀적인 술책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용이다.
6,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 살아나시며” 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나서 스스로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번 생각 해 보자!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라면 자연스럽게,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려서 살아나신 것으로 이해하겠지만, 이제 교회에 처음으로 들어온 초신 자로서 성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순수 그대로의 모습으로 신경을 접했을 때는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분 예수께서 또 다시 살아나신, 스스로 살아나심으로 알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사도신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문장을 보면, 오히려 예수 스스로 살아 나셨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분 예수그리스도는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그러나 신경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하는 내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하는 내용이 없는 것은, 예수 자신 스스로 다시 살아나심을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행3:15)--하나님이 살리셨다,
(행2: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 있 을 수 없었음이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셨음을 말하는 성경의 내용들(성경을 찾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행2:32, 3:15, 4:10, 13:30, 37, 롬8:11, 10:9, 고전6:14, 15:15, 갈1:1)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부활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인가?--이것은 아니다. 스스로 부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은 스스로 부활 할 수 있는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는 분이시다(요10:17,18)
그러나 스스로 부활하시지 않은 것은 오직 독생자로서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살리심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 그분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1서4:7-10)-- 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롬3;22-26)를 완성하게 됨으로서 아버지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자기스스로도 부활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 자신이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부활을 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께 부활의 역사를 맡기셨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드려 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온전한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요8:54-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경”에서 말하고 있는--“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라고 한 것은—-예수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살아남을 뜻하는 말이 되므로, 성경과는 거리가 먼, 진리가 아닌, 비 진리가 되고, 그러면서 예수는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으며, 자기 영광 위주의 삶을 살았다는 아주 잘못된 마귀적인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 살아 나셨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나올 수 있게 된다.
1)예수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마27:62-66)
2)예수는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가로 챈 자였다. 라는 비판과 함께, 그래서 의인이 라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3)예수그리스도는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뜻에 의 해서 살았던 자라는 마귀의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다.
4)이와 같이 본다면, 예수는 구원의 주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가 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신경에서 “스스로 살아 나셨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아주 고단수의 계략이다. 라는 말을 아니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을 차단하기 위해서,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스로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 되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사망의 음부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하사 부활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를 살려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요.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셨다는 주장의 위험을 제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하게 죽으셨다. 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 또한 완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고, 그렇게 될 때, 요12:24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부활 하셨다고 한다면, 앞서 말씀했듯이,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나, 그 밖의 이단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은 육체뿐이었지, 육체와 영이 온전히 분리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들 주장의 근거를 재공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즉, 잠깐의 기절상태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당시에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그리고 바리세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 해 심히 경계했던 내용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과 육이 온전히 분리된 상태로 완전한 죽음에 이런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죽음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분이 스스로를 부활케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살아나신바 되었던 것이다.
7, (우리 사도신경에는 없다)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본래의 사도신경과 영어에 있는 이 말은, 우리가 현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없다—-그 이유는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이 내용이 너무 이상하고,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찜찜한 내용이므로 위 내용을 삭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 사도신경에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카톨릭에서 이 내용을 삽입한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에게 고난 받고, 그리고 죽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죽어서 지옥에 까지 내려갔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고 밖에 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행2:27에서—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31절에서는—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의 신경에서“지옥에 내려 가셨다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카톨릭 그들의 교리에 연옥 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죽어 연옥에 가면, 땅위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연옥에 간 그를 위해 돈을 많이 내고, 착하고 선행의 삶을 살면,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희괴 망측한 논리의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래 이러한 사도신경을 만들 때에, 그들의 의도적인 목적을 알기 위해서 다음을 이해하고 넘어 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고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라는 내용을 신앙고백서에다가 삽입시켰을까?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1)앞에서 신경을 살펴 본데로 한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이 죄 값으로 지옥에 갔다. 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해 주려는 것이 된다.
2)이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무결하시고 점도, 흠도 없으신 분이신데, 지옥에 갔다. 라는 것은 죄짓지 않아도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므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를 교묘히 희석 시키려는 사단의 고도의 전술로 봐 진다.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함을 받고 의인 된다. 그래서 천국 간다” 라는 구속의 원리가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이것을 노린 것이다.
3)예수그리스도께서 지옥에서—(그 다음의)-“하늘에 오르사“로 연결시켜 보면, 지옥에 갔다가도 다시 천국으로 갈수 있다. 라고 하는 본래 카톨릭 교황청 그들의 교리 중(이 땅에서 죄를 지어 연옥에 갔다가도 이 땅에 남은 후손들이 기도하고 많은 선행을 하면, 천국에 간다)라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성경-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선행과 돈이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8,하늘에 오르사
여기서도, 예수 스스로 하늘에 오른 것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신 것은 스스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강력한 성령의 능력으로 들리어 올라가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 한글판(행1:9)에는—-“들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킹제임스는—-“그들이 보는데서 위로 들려올라 가시니”로 변역하고 있다.--
▶그러면 원어 상으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나?--(에파이로)--들어 올리다, 높이다, 들리어 올라가다. 즉 누구의 도움에 의해서 하늘로 올리우게 되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성경에서 변역한 것에는—”올라가시니”로 변역 되어 있다. 이것은 스스로 올라가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지므로 잘못된 변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시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대로, 또는 되어 진 데로 되는 것이다. 그분이 모범을 보이신 그대로, 우리가 후일에 부활하게 되는 것이요, 부활 후에 하늘나라로 들림 받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들림 받게 되는 것이 내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승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들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올리우게 되심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에 의해 들림을 받게 된 것이지, 혼자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 들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스스로 하늘로 들림이 되셨다면, 우리가 후일에 들림을 받을 때도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들림을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쉬운 성경”의 변역은 스스로 올라가신 것으로 변역되었기에 이것은 잘못된 변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단의 전략은?--교황청의 교리처럼 내 스스로 선한일 많이 하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라고 하는, 자기 능력으로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자신들의 교리주장에 맞춘 것이다.(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자기들 나름대로 교리다)
9,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대체로 사도신경은 내용적으로 보아 예수님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바는, 창세 때 부터 아버지의 품속에서 계속 있다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아이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아버지의 옆 보좌에만 가만히 앉아계시다가 심판할 때 그때에 세상을 심판 하려 오시는 그런 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그런 예수님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이다.
본 사도신경의 문제는, 그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역사를 운행, 감독하시며,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시고,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요, 복과 저주의 주관자 되시며, 온 세계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은 창세이전(엡1:4-6)부터 시작하여∼ 창세기1장의 창조부터∼계시록의 일곱 인 때는 작업까지, 그리고 백보좌 심판까지 모든 구원이 완성되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쉬엄 없이 일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일하심을 구체적으로 보자**
‣그분은 온 인류를 위해 쉬엄 없이 일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신다.
(롬 8:34, 딤전2:5, 히12:24, 요5:17-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느니라)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신다(고전 1:8-9 견고케 하시고/ 교제케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징계하시고(히12:6),아버지 앞에 우리를 위하여 대언 하여 주신다(요일 2:1)
‣그분은 일곱 금 촛대들(지상의 교회들)사이로 다니시며, 교회들의 머리로서 교회들 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계1:12-20, 계2, 3장)
‣그분은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신다(롬12:19)
‣그분은 온 우주의 운행을 맡고 계신다(히1:3)
‣그분은 생, 사, 화, 복을 주관 하신다(신30:15,16)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도 하지만, 서 계시기도 하다(행7:55,56)
‣그분은 바울에게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었고(행9:4-16)
‣그분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를 준비 중에 있다(요14:2-3)
‣그분은 사단을 통하여 시험과 환란을 허락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시면서 우리의 믿 음을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토록 일하신다(욥1:12, 2:6, 레위기26장, 신명기28장),
‣일곱 교회(전세계의교회)를 통치,관활, 지도, 감독, 권고, 징계하신다(계2장-3장)
‣일곱 인을 때시고, 그 인 때심의 승치를 이루신다(계5:1-9, 6:1-18장)
‣아마겟돈 전쟁과,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통한,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는 작업을 하신다(계14:14-20)
‣천년왕국의 통치와 다스리심(계20:1-6), 그리고 곡과 마곡 전쟁을 통한 미혹 하던 마귀를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시는 일을 하신다(계20:7-10).
‣백보좌 심판을 통한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는 일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 역은 끝이 난다(계20:11-15)
--그리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신 예수님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 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고전15:24). 그리고 모든 사역이 끝난 후에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 라고 말씀하신다(고전15:28)
이처럼 예수님은 그냥 앉아 있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쉬엄 없이 일하신다. 그런데도 신경은 그저 보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쉬엄 없이 일하시는 그 사역에 관한 일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사도신경 어디에도 주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쉬엄 없이 일하고 계신다--(이사야62:1)
10,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여기서“저리로서”란?--그곳이라는 엣 말에 —-로부터, 라는 조사가 붙은 고어적인 표현이다.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그곳으로부터” 라는 말씀이 된다.
▶따라서 이 말대로 풀이 하면, 그리스도께서 알 수 없는 어떤 하늘 그곳에 있다가 심판 하려 오신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 즉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확하고, 확실한 장소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장소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신앙고백자의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과 꿈의 목표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요14:2-내 아버지 집, 계21:1-4-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10-25-거룩한 새 예루살렘의 구체적인 모습, 계22:1-5-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곳)
그러나 “신경”에서는 그 나라에 대해서 정확히 밝히지를 못하고 있다. 이것은 천국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과 꿈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오심을 말하는 것이고,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는 자들인데, 무슨 이 땅에서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며,
*또한 이 땅에서의 심판이라고 할 때는, 주님께서 구름타시고 이 땅에 임하시는 그때에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서 이 땅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되는데, 참으로 성경에 없는 이상한 말이 된다.
*만약에 이미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그 죽은 자가 죽었어도 아직 심판을 받지 아니했다는 것이 되며, 그렇다면 심판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음부에, 또는 낙원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말인가? 무슨 어떠한 근거에 의해서 나뉘어 졌다는 말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리고 산 자들 또한 주님께서 구름타시고 이 땅에 오실 그 때에 심판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실제 죽은 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이미 심판이 끝난 자들로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있는 기간 동안에 주님은 사단을 통하여 환란을 통한 시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여부를 통하여 이미 알곡과 쭉정이로 심판은 결정되어지는 것이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이미 결정되어진 알곡과 쭉정이를 추수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하려 오신다”고 하는 것 또한 잘못된 말이다. 주님의 재림은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추수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여기서 추수하기 위해서 오신다. 라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환란이라는 것으로 심판은 이미 끝난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고, 심판이 끝났다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가운데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알곡이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 신경대로라면, 주님께서 오셔서 죽었던 자를 다 살려서, 이 땅에서 죽었던 자와 살아있는 자에 대하여 막 심판을 시작 하신다는 뜻이 된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사람이 이 땅에서 죽는 그 순간 우리의 심판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추수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심판은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이 땅의 삶 가운데에 이미 사단의 시험을 통해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고, 그러므로 환란이 올 때, 또는 사단의 시험이 있을 그때에 우리는 반드시 싸워서 승리해야함을 말씀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에는 이 같은 내용을 찾을 길이 없다.
▶계시록14:14-20 절은 주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심판된 알곡과 쭉정이를 낫으로 거두시는 추수장면을 말씀하고 있다.
▶또 하나의 내용은 이 신경은 천년 왕국에 대해서, 믿지 아니하는 무 천년설을 주장하는 것 같다.
어거스틴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다스리는 것을 믿지 않았다. 칼빈, 또한 천년왕국을 믿지 않았다.
즉 무 천년설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천년동안 통치하시며, 그 후에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주어 심판을 받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곧 백보좌 심판이다.
**계시록 19장과 20장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은 세상을 친히 통치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며,
심판은 천년 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에서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 천년설에 근거한 것으로 만들어 졌다고 보여 지며,
그분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 시에는,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다기 보다는 심판은 생존해 있는 날 동안 사단을 통하여 이미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는 작업을 통해 역사 하셨고,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종 된 자를 추수하기 위해서 아버지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심판주의 재림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오시는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로서의 목적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본 신경에서는 이러한 핵심 되는 진리를 찾을 길이 없다. 따라서 “신경”은 하나의 껍데기에 불가 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신앙고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1, 성령을 믿사오며
여기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믿사오며, 라고 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성령은 믿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믿는 것과 받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행1:5,8, 2:4,38, 8:15,18 10:47, 11:16, 요20:22--등)
*그러면 왜 “성령을 믿사오며“ 라고 했을까? 그 이유인즉—진정 믿음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 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고도의 마귀의 전략이라고 봐 진다. 믿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씀이요. 하나님이신 말씀(요1:1)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 하시는 영이시다(요16:13). 그러므로 “성령을 믿사오며“ 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낳게 만든다.
▶신앙인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의 대상을 말하면서 에수그리스도를 빼 버리고, 오히려 성령님을 믿는 대상으로 잘못 유도함으로서 정작 믿음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를 놓치게 만들었고,
▶또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살아야 하는 성령을, 믿는 대상으로 잘못되게 유도함으로서 오히려 성령의 인도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함으로서 이로 인하여 도리어 말씀순종의 삶을 살수 없도록 방해 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내 능력으로서 자기행위적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아주 잘못된 고백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고백은 믿음의 대상과, 순종의 대상을 바꾸어 고백케 함으로서 내 영혼을 멸망의 길로 인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카톨릭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순종은 성령님의 인도가 아니라 오직 교황의 뜻대로 따라야 한다.“ 는 인식을 주입시키기 위한 아주 교묘한 마귀의 술책이다.
※그 마귀의 술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예수 믿는 것을 없애고, 마리아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며,
2)믿는 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얻는 것인데—이러한 성령님의 인도함이 아니라, 교황의 말한 대로 순종 받게 하려는 마귀의 작전이다.(이것이 우리영혼을 멸망케 하려는 마귀의 전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3)예수를 믿음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성경적 구원의 도를 파하고,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구원은 행위에 있음을 강조하는 그들 카톨릭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4)신경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나타내야 할 믿음의 대상에 대해 “성령을 믿사오며“ 라는 말로 참 믿음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를 그 믿음의 대상에서 제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신경에서는 우리가 구원 얻기 위해 믿어야 되는 그 중요한 믿음의 대상이 누구 인지를 전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얼마나 강하게 사단이 역사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12, 거룩한 공회와(Holy Catholic Church)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공회는, Holy Catholic Church를 번역한 것이다.
카톨릭은 자기 스스로 카톨릭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회라 하면 대개 바티칸 공의회, 트렌트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들 공의회들은 성경읽기와 성경 소지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며,
(1229 툴루즈 공의회)
http://www.aloha.net/%7Emikesch/banned.htm
*외경을 성경 안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기독교 개혁운동을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하였으며( 트렌트 공의회 1545-63),
*카톨릭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든가( 라테란 공의회 1215, 플로렌스 공의회 714) 등 의 매우 엉터리 도그마를 주장해왔다.
*또한 카톨릭은 마리아가 공동의 구속 주라고 주장을 하며, 마리아의 무죄 설, 마리 아의 성천 설, 등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여기서의 공회에서는, 카톨릭의 교황과 추기경단을 지칭하는 의미가 짙다. 카톨릭 에서는 이러한 조직을 “공의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의회가 절대로 거룩한 공의회가 될 수가 없다. 라는 사실이다. 거룩 이라. 함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인데, 인간들의 모인단체를 거룩이라 하는 것은, 곧 자신들이 신이라는 것이니,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성경적 이지 못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만을 일삼는 그들의 모임단체를 어찌하여 “거룩한 공의 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님당시의 바리세인들과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교만, 거만, 오만한 자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들이 소위 말하는 공의회라고 하는 것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살육 하였으며, 쟌 후스가 화형 당한 것도, 교황청의 면죄부 교리와 싸우다가 콘스탄스 공의회에 의해 정죄 받아 죽은 것이다.(1415)
(http://en.wikipedia.org/wiki/Jan_Huss)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박해를 받은 원인이 이러한 공회 권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는 거룩한 공의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신경에 대해 거룩한 공의회라 하는 것은, 그들의 공의회에서 결정되어지는 모든 것은, 신도들로 하여금 모두 신의 명령으로 믿고 따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더럽고 추한 마귀들의 장난이다.
13,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말은 언뜻 보기에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성도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을 주의 백성을 일컫는 말이다(고전1:2).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도는, 시성한 죽은 성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2014.8.16.대한민국 수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시복식 때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래서 본래 사도신경의 이 문장은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로 되어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와 산 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
카톨릭에서는 성인식을 하는데, 사람이 죽은 지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처 교황이 이들을 임명하면 복자, 성자로 서품되는 것인데, 이것은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강신술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미신에 속한 짓이다.
(신18:11, 사8:19-20),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가 과거에 죽은 자, 즉 복자나, 성자에게 기도하면, 죽은 그들이 산자의 기도를 들어 준다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의 내용을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잡 신교, 무당들이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제나, 강신술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유교나 불교나 잡신 무당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카톨릭에서 이렇게 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첫째,-자신들의 착한일, 또는 선행을 많이 하면, 좋은데 간다. 라는 자신들의 교리 를 정당화 시키고자 하는 교리의 정당화를 주장하려는 것이요,
▶둘째, 이런 제도적인 것을 통하여 일반 신도를 카톨릭의 제도 울타리 안으로 묶어 둘려는 속셈이 있다.
▶셋째, 이 같은 제도를 시행함으로서 카톨릭, 나아가 교황 자신이 신이라는 이미지 극대화로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를 더 말하자면, 물질에 대한 부의탐욕과, 카톨릭에 대한 신도의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겠다.
**극히 인간적이고, 극히 육적이요, 신앙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요, 강신술로서 미신적인 것이며, 성경에서는 철저히 금하고 있는 일이다**
▶카톨릭은 죽어서 성자로 서품된 자들에게 어디서든지 신도가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것으로, 죽어서 성자로 서품된 자들은 신으로 바뀌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카톨릭이 유골까지 섬기는 다신교집단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면 교황은 어떤 자라는 것인가? 교황이 신을 만들었으니 신중의 신이라는 것이 된다. -하하 참으로 가관이다-그래서“교황”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인가?
▶옛날에 죽었던 그 사람을 교황이 성인되게 하여, 그 죽은 성인이 살아있는 자들과 서로 교통할 수 있고,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성인된 자에게 기도하면 그 죽은 자의 공로가 내게 와서 내가 복을 받게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이것을 “성인 통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들은 이러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교황에게 아부 하게 되고, 살아있는 자기의 형제 중에 이러한 성인이 되기를 원하게 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헌신을 하려고 하겠는가! 사람의 연약한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육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비열하고, 허무맹랑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술책에 다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일반 주교나, 신도도 이와 같이 성인이 되어 살아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준다면, 교황이 죽어서는 모든 일에 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으로 교황이 죽은 것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그들의 교리 중 교황은 신이라는 교황 무오 설을 은연중에 나타내려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이다.
▶또 예수그리스도는 그들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이며, 마리아는 그 신들의 어머니다. 라는 하늘의 여황, 죽지 않고 승천한 여인, 예수님의 모후(어머니), 평생 동정녀, 구원의 중보자, 등으로 착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보다는 마리아를 더 숭배한다. (그 단적인 예가, 2014.8.15.대한민국 수도 서울, 광화문 광장의 시복식 때에 그들의 단상위에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 새긴 것을 그처럼 좋아했지만, 예수의 형상은 없고, 그러나 성모 마리아의 상은 제단위에 굳건히 세워두었던 일을 기억한다. 이것은 예수보다는 마리아를 더 높이 섬긴다는 뜻이다)
14,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 문장 하나만으로 따로 때어서 보게 되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앞의 문장, 즉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를 연결시켜서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진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죽은 성인들의 통공)에서는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속죄함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황이, 또는 죽은 성인이,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으로 해석 되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는, 따라서 그들의 교리중 하나인, 카톨릭만이 죄를 사한다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고, 그들만이 구원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교리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는, 오직 카톨릭만이 죄 사함을 받아 영원히 사는 것, 즉 구원이 있다. 라는 것을 은근히 말하면서,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는 소위 연옥에 간 사람도 땅위에 사는 신도가 헌금을 많이 하고, 착하고,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그들의 교리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이것은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는다고 하는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믿는 자를 죽이려는 사단의 음흉한 술책에 불가 하다)
※그러나 성경은, 진심으로 통회하고 자복할 때, 죄를 사해 주시고,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피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택한 자라 할 찌라도 잘못된 믿음의 삶을 살 때에는 지옥의 형별을 면치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넷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부분에서는 “우리의 죄 사함을 입었다”는 진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성인들의 통공 에서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앞뒤에 그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죄 까지 다 사해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는 구체적인 말이 한 마디도 없다.(그들에게는 그러한 이유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그들 자신들, 즉 신부들, 사제들, 교황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들의 죄를 사한다는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로마 카톨릭은 매주일 "미사"(라틴어로 희생)를 거행한다.
그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비슷한 희생 제사를 매주일 지내며,
그것을 통해서 죄가 매주일 용서되어진다고 가르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소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는 교황과, 신부, 사제만이 죄를 사해 준다. 라고 믿으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도, 카톨릭 교회에서 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경의 문제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내 죄의 용서함을 받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교황이나, 신부에 의해서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되고, 또한 죽은 성인에 의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는 그들의 음흉한 계략이 숨어 있는 문장임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구속의 도를 정면으로 역행 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만이 속죄의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엡1:7—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히9: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 함이 없느니라
*벧전1:18-19—너희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오직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 같은 보배로 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계1:5—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문장에서는—-우리의 몸이 부활 시에, 영의 새로운 몸으로서의 부활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문장대로라면, 육신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부활 할 경우에는 시, 공간의 제한을 받던 과거에 죽었을 때의 그 몸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부활 시에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 우리의 썩을 몸 그대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고전15:35-54).
그러나 위의 신경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가 죽었을 때의 몸 그대로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부활 시에는 썩지 않을 완전히 변형된 새로운 몸을 입는다.
*다시 사는 부활 때에는 현재의 육신의 몸 그대로가 아니라, 시, 공간의 재한을 받 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가 순식간에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부활하며, 우리는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같이 변형된 몸이 되어 산체로 천국에 올리움을 받으신 신령한 예수그리스도와 같 은 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이다.
(고전15:48-54)(요일 3:2).
▶그 다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영원히 살게 되는 몸은 시 공간의 제한을 받던 땅에서의 육체의 몸 그대로 영원히 살수 없고, 변화된 새로운 몸을 말한다.
고전15:51절의-홀연히 변화된 몸이요.
52절—썩지 않는 것으로 다시 살게 된 몸,
53절—죽는 몸에서,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게 된 몸,
54절-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어 다시는 죽음이 없는 몸으로--
이러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 나셨을 때, 그리고 하늘로 올리우신 바로 그 몸과 똑 같은 몸으로 변화된 몸이다.--성경은 이러한 몸을 신령한 몸이라 말씀하고 있다.--즉 영체의 몸이면서, 그러나 육을 가진 몸을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몸은(신령한 몸)--시,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몸을 말한다.
*요20:19—문들을 걸어 닫은 상태에서—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영체의 몸)
*그러나 20절에 보니—육을 가졌다.--*육신의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27절에 십자가에 달렸을 때의 상처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22절에 호흡도 하신다.---- *숨을 내쉬며,
*말씀도 하신다(19절, 21절, 요21:5-6, 15-23)
*음식을 먹기도 하신다.(요21:9-15)
따라서 부활 후의 몸은- 1)시,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영체의 몸이요.
2)육신의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숨을 쉬고, 말씀하시고, 음식도 먹는 인간 육신의 모든 기능을 다 가진 그러한 몸인 것이다. 감각, 느낌, 생각, 사고—기타 모든 인간의 기능적인 것 등은 지금의 인간능력 보다도 수 십배, 또는 수 백배 더 높다. 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서는 인간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감각보다도 더한 고통 속에 시달릴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16.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없지만, 본래 그들의 신경 맨 마지막에는 “이 신앙 고백을 반대하는 자 에게는 저주가 있을 찌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들 원래의 사도신경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이단 분별의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경이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무서운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이다. 이와 같은 신경을 대충 뺄 것 빼고 해서 정통기독교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너무나 잘못된 것이 아닌가?
결 론
지금까지의 내용 설명에서 보았듯이, 이와 같이 극히 사단 적이요, 비 성경적인 사도신경을 매주일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작 시에 암송함을 통하여 나의 신앙을 주님께 고백한다. 라는 것은 참으로 잘못되고 주님을 노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거짓의 신경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일부 어떤 목사님들은, 신경의 이러한 잘못된 사실을 알고 일부의 교회가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고백)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하여, 그러한 교회를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한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누가 이단이며, 누가 삼단인가? 하나님의 진노를 어찌하려고 그러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도신경은 예수님당시에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마 카톨릭 신부들이, 소위 자기들이 만든 교리와 상의하는 그 어떤 단체나, 교회에 대해서, 이단 정죄의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엉뚱한 것을 가지고, 사도들의 신경 이라고 명하고, 성경의 진리와는 정 반대인 마귀요, 사단의 시종 노렸을 해서 카톨릭 자신들의 이단의 교리에 따라 만든 신경을 가지고, 이단 규명의 잣대로 규정한다니 참으로 어불성설이다.
이 지구상에서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는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카톨릭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대로 신경은, 이단의 판별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이것을 만든 그들이 이단이 아니던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사단이 만든 신경을 통하여 앞으로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 핍박을 가해 올 것이다. 이미 이러한 일이 차근, 차근 진행돼 가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반대하는 자는 신앙의 최대의 적이며, 그들의 이단으로 정죄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관주 한다.
이미 이들은 전쟁을 선포 했다. 자기들의 교리와 다른 자는 적으로 관주하고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현제 교황인 프란체스코 교황이 약2년 전에 영국BBC 방송의 좌담에서, 성경이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예수께서 실제적으로 문자적으로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라고 하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요한 계시록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면서, 세계종교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전 세계를 향해 이러한 근본주의자들, 즉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들은 인류 최대의 과격분자들이라고 판단하며, 자신들의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대적 할 것이라고 선언 한바 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에서 “산돌소망교회”를 치시고 홈패지로 들어와 “프란체스코의 전쟁 선포“ 제목의 동영상을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앞으로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잔혹하게 핍박할 것이다. 그들은 제수이트(jesuits)라는 “예수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서약 합니다.
기회가 올 때 나는 모든 이단자와 개신교도 및 자유주의자를 상대로
은밀히 또는 공개적으로 줄기찬 전쟁을 감행할 것이며,
지시에 따라 그들을 온 지면에서 근절 박멸할 것이며,
연령 성별 또는 상태여하를 막론하고, 이 악독한 이단자들을
목매달고, 불에 태우고 굶기고, 물에 삶고, 가죽을 벗기고,
목을 조이고 생매장하여 죽일 것이며, 그들 저주스런 인종을
영원히 섬멸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를 벽에 쥐어박아 부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은밀히 독약, 목 조르는 줄, 비수, 또는
탄환을 사용하되 그들의 명예, 지위, 신분 또는 권위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교황의 대리자나, 거룩한 예수회 형제단의
상관의 지시를 받는 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맹세한다.
현제 교황인 프란체스코가 바로 여기 예수회 소속이다. 그렇다면 현재교황이 이러한 서약을 했던 자라는 사실에서 볼 때, 앞으로 기독교에 미칠 이 엄청난 환란은 눈에 보듯 뻔하다. 평화의 사도라는 가면을 쓰고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지만, 이제 그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려 낼 때가 얼마 남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을 시점으로 세계의 종교를 통합하여, 단일정부를 이루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지금까지 미루어 졌는데, 이제는 그 분위기가 익어 가고 있음을 이번 프란체스코가 세계를 방문하며 벌인 쇼 등을 통하여 충분히 보게 되었다. 이제 곧 그 거짓된 평화의 가면을 벗을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이런 자들에게 동조, 찬동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것인가? 머뭇머뭇 할 시간이 없다.
▶결국 현대교회의 사도신경 옹호론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유지, 계승하는 카톨릭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 정신, 즉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이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곧 이단일 것이다.
**끝으로 사도신경은, 성경과 비교하여 부적격성의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출처가 로마 카톨릭이라는 사실이며,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이단의 판별을 위한 기준과 도구로 만든 것이고,
▶완전한 신앙고백이 되지 못하며,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본 신경은 성경과 전혀 다르며, 다분히 미신적이고, 사단 적이다.
▶지금 현제와 같은 신경에 의한다면 카톨릭은 기독교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그 이유는 지금의기독교는 그들의 신경과 너무나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예배시에 암송했던 사도신경은 믿는 자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으 로 이끌어서 결국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한 사단의 계략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일학교와 초신 자들에게 사도신경을 외우게 하는데, 성경에서 사도들이나, 또는 초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였다는 말도 없거니와, 사도들이 그 신경을 썼다는 말도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것은 수백 년 지난 다음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와 같이 오늘의 카톨릭이 사단의 시종 노릇을 하면서 만든 사도신경을 성도들에게 암송하게 하고, 또 이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하며, 예배의 중요한 첫 시작에서 고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며, 결코 용납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외우게 하느니, 성경 말씀 그대로를 외우도록 권장 한다면, 훨씬 더 정확한 진리의 신앙으로 자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사도신경은 성경적이 아니며, 이단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며, 우리의 기독교인의 신앙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단의 음흉한 흉계가 숨어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현제의 사도신경은 절대로 기독교인의 참된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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